희생 (Offret, The Sacrifice, 1986 )
평점 8
정성스레 물을 주면 죽은 나무도 꽃을 피운다는 전설을 아들에게 들려주며, 전직 연극 배우이자 교수인 알렉산더(Alexander: 어랜드 조셉슨 분)는 그의 생일날을 맞아 친구들이 그를 찾아온다. 뉴스 속보를 통해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모든 걸 포기하겠으니 이 위기에서 구원을 해 달라고 말한다. 그의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우체부 오토(Otto: 알란 에드월 분)가 그를 찾아와 그의 집 가정부로 있는 마리아(Maria: Gudr?n Gislad?ttir 분)와 동침을 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한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마리아를 찾아가고 결국 그녀와 동침을 하는데.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이 빚어낸 숭고한 희생의 의미
알렉산더: 만약 우리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바흐의 <마태수난곡 St. Matthew Passion BWV 244-Alto Aria “Erbarme Dich“>이 흐르는 가운데 화면을 가득채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영화 전반을 통해 희생과 구원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신을 향한 부르짖음, 즉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이 땅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기도하는 사도의 마음은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에게 전이된다.
연극배우이자 비평가이며, 교수이기도한 알렉산더는 이 땅의 지식인들을 대표한다. 따라서 파멸의 위기에 놓인 세상, 혼란한 세상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과 이를 뛰어 넘어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간절함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알렉산더의 입을 빌어 영화는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간의 야만성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지적한다. 문명의 발달은 권력과 공포위에 세워졌으며, 기술적 발전은 안락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파괴의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인류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파괴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데아를 추구했던 플라톤의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은 곧 현실로 옮아와 알렉산더의 부채의식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신의 바람에 역행하는 일련의 잘못들, 즉 에덴동산의 조상들로부터 비롯된 원죄의식 이상의 살상과 파괴의 행위들이 초래한 파멸 위기의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아쉽게도 알렉산더의 부채의식은 행동으로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이는 좌절되었거나 사라져버린 인간들의 책임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있지도 않은 제3차 대전의 발발은 곧 ‘위기의 세상’이 파멸의 지경에 다다르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임과 동시에 신에 의한 인류 대심판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이 순간 고유의 색을 발해야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빛깔을 잃고 생기를 잃었으며, 무채색의 무의미한 것들로 변질되었다. 이는 곧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위기의 인간들, 그리고 파멸 직전의 죽음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을 향해 눈물로 호소하는 알렉산더를 추동하는 ‘발신자’로서의 힘은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길 염원하는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수신자’로서의 그 무엇은 파멸 위기의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어린 손자 ‘고센’은 미래의 이 땅을 짊어질 주인이며, 우리는 이들에게 온전한 세상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알렉산더에게 강요되는 이 같은 책임의식은 지식인으로서의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때 알렉산더는 ‘조력자’ 오토의 조언에 따라 ‘마리아’와 동침함으로써 신비스러운 신의 영역에 다가서고자 한다. 성령의 힘으로 아이를 수태하였던 동정녀 마리아와 그녀의 배를 빌어 태어난 아이의 ‘희생’이 이 땅의 구원을 가져왔던 2천여 년 전 먼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동일함에서도 추측 가능하거니와 서로의 몸을 섞는 알렉산더와 마리아의 몸이 떠오르는 장면은 결과적으로 신의 힘이, 신의 자비가 있어 이 땅을 구원하실 것임을 짐작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최종적인 선택은 자발적인 산화(散華), 즉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 땅의 구원을 요청하는 예수의 삶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이때의 희생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의 복구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는 알렉산더의 최종적인 행위는 산화하는 알렉산더 자신을 상징함과 동시에 평생을 통해 ‘진리’란 무엇인가를 갈구하며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순례자이며 지식인이었던 알렉산더가 궁극으로 다가선 해탈의 경지, 열반에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불을 지른 후 미쳐 날뛰는 그의 행위는 범인(凡人)으로서의 정상적 삶을 살아 갈 수 없는 ‘진리’를 찾은 광인(狂人)으로서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다. 불타오르는 집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오리엔탈적인 일본 음악, 그리고 태극 문양이 그려진 검은 도포 자락을 걸친 알렉산더의 날뜀이 겹쳐지는 대목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St. Matthew Passion BWV 244-Alto Aria “Erbarme Dich“>이 흐르는 가운데 목소리를 찾은 어린 손자 ‘고센’의 외마디는 곧 새로운 탄생, 즉 ‘고센’의 뒤로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상징적 어머니 ‘마리아’와 ‘목소리를 냄’으로써 탄생한 ‘고센’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인류 구원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무 곁에 누워 ‘목소리’를 내 제 아비에게 질문하는 ‘고센’의 모습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신 아들 예수가 그의 아비에게 질문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영화 <희생>은 한 가족의 가장이자 지식인인 알렉산더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얻은 인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희생’의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은 알렉산더로 하여금 희생을 선택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알렉산더의 희생은 이내 숭고한 힘으로 발전하여 인류를 파멸의 위기에서 구원한다. 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 전쟁이 멈추고 인류가 파멸의 위기로부터 벗어나자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들을 희생양으로 바쳤던 아브라함의 마음으로 알렉산더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신의 뜻에 보전하려한다.
이는 부채의식을 미래의 주인이 될 어린 손자에게 전이시키지 않으려는 할아비로서의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지식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의 해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희생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천년 전 이미 하늘의 아들이신 예수의 희생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우리는 예수의 희생 덕택에 여태껏 목숨을 보전하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처 : 블로그 > 넌 커서 뭐가 될래?
☞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입니다. 성인 영화를 가르는 초기부터 얘기는 했었지만 고전영화에 속하는 작품은 세월도 오래 흐르고 해서 요즘 현대물처럼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작품은 그닥 많지는 않을 듯 해서 이곳에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는 작품중에는 그나마 선별 해서 올리긴 하지만 위의 작품같은 경우는 저도 모르는 작품이라 큰 걱정은 하진 않지만 혹여라도 작품을 보신 분들은 이 작품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 말씀 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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