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청계산 오르기 전 추사 김정희를 알고 가면 좋습니다

고재순 2023. 2. 3. 13:00

추사박물관부터 청계산 옥녀봉까지

코로나19 시대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기분전환 할 수 있는 서울 산책로를 소개합니다. 3년에 걸친 발품 끝에 덜 알려진 장소를 전 국민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이상헌 기자]

양재동과 과천시 주암동 사이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청계산을 오르면 남으로 바라산과 광교산으로 이어져 수원시까지 한달음에 내려갈 수 있다. 산세가 제법 깊어서 곳곳에 둘러볼 만한 명소가 여러군데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로는 서울대공원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고 등산객이라면 매봉과 석기봉을 거쳐 청계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많이 들른다.

이곳 청계산 한켠에 서울시에 유일하게 있는 화장터 서울추모공원이 자리하여 장례식을 담당하고 있다. 서울시설공단이 운영하는 장사시설로서 필자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이라면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산책 코스는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에서 출발하여 옥녀봉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삼포마을로 내려와 추사박물관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다.

주말에는 사람이 붐비므로 서울추모공원에서 올라오는 길을 추천한다. 신분당선 양재역 10번 출구에서 서초08번 마을버스를 타면 서울추모공원까지 25분이면 도착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지도를 첨부한다.

▲ 청계산 산책루트 청계산 옥녀봉에서 과천 경치를 감상하고 추사박물관에 이르는 길.
ⓒ 이상헌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 2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가 굴다리 밑으로 우회전하면 청계산 원터골이다. 양재역에서 시작되는 경부선 고속도로 밑을 지나는 굴인데, 여기에 시골 장터의 좌판이 주르륵 늘어서있어 기웃기웃하면서 걷다보면 청계산 들머리가 나온다.

맑을 청에 시내 계를 쓰는 지명(淸溪)에서 알 수 있듯이 산책로 초입부터 계곡물이 상쾌한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우측 진달래능선으로 가는 길을 타면 봄에는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길을 거닐어볼 수 있다. 해발 376미터의 옥녀봉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므로 천천히 걷더라도 한 시간이 안 걸려 도착한다

▲ 청계산 옥녀봉 벼랑 위에 만들어진 옥녀봉에서 과천 시내와 관악산을 조망할 수 있다.
ⓒ 이상헌

▲ 과천대공원호수 옥녀봉에서 바라본 과천대공원.
ⓒ 이상헌

 
정상의 북서쪽은 벼랑이기에 탁 트인 시야가 펼쳐지며 여기에 넓다란 조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서쪽으로 렛츠런파크서울(경마장)을 굽어볼 수 있으며 그 옆으로 과천대공원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뚝 솟아 마주하고 있는 관악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서므로 벤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경치를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옥녀봉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추사박물관으로

옥녀봉에서 양재역 방향으로 내려오다 좌측 샛길로 빠지면 과천서울대공원과 삼포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 마을 바로 옆이 과천경마장이고 인근에 추사박물관이 서 있다. 삼포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노래가 있을것이다. 배따라기의 이혜민이 만들고 강은철이 부른 <삼포로 가는 길>이다. 

이혜민이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을 걷다가 마주한 삼포마을을 보고 마치 동화속 풍경 같은 느낌을 받아 작사·작곡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은철의 미성이 안겨주는 묘한 분위기의 노래로 이후 삼포마을은 창원시의 관광명소로 이름을 떨친다. 비록 진해구의 삼포마을은 아니지만 과천시 삼포마을은 전원주택이 늘어서 있어 푸근한 인상을 전해주는 곳이다.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길 있겠지" 가사 한 귀절을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추사박물관에 도착한다.

▲ 과지초당 김정희가 기거했던 한옥으로서 추사박물관 앞마당에 조성되었음.
ⓒ 이상헌

박물관 바로 앞에 노년의 추사 김정희가 머물렀던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복원해 놓았다. 단촐한 한옥에 추사의 동상이 서 있고 또 자그마한 연못이 자리한다. 아버지 김노경이 세상을 뜨자 김정희는 옥녀봉 중턱에 부친의 묘를 안치하고 3년상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힘든 시절에 자신을 갈고 닦아 눈부신 업적을

추사는 조선 왕실의 외척(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남달랐다. 15세의 나이로 당시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제자로 들어가 학문에 힘을 쏟는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4개월 정도 연경에서 머문다. 이 시기에 융성한 청나라 고증학을 접하고 당대 지식인과 소통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서편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나간다. 삼십대에는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며 눈부식 업적을 쌓는다. 병조와 이조참판을 역임하는 가운데 윤상도의 옥사가 발발하여 9년 동안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 맑은 물 흐르는 청계산에서 추사의 자취를 보다 ⓒ 이상헌

윤상도는 고위 관료의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임금과 신하를 이간질 한다는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 상소문을 쓰는데 김정희가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안동 김씨가 매관매직을 일삼던 시절이라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과천에서 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조선이 낳은 천재 지식인이자 실학자이며 서화가로서 그의 걸작품인 세한도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려진다. 힘겨운 유배생활을 하면서 추사체라는 독보적 글씨도 이때 완성되어 역사에 큰 필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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