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동은 진도를 대표하는 작물이다. 12월부터 재배하지만 겨울 추위를 이겨낸 이맘때 봄동이 단맛이 강하다. 진도 군내면 봄동밭에서 농민들이 분주하게 봄동을 수확하는 모습. 최승표 기자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드는 것이다. 따사로운 볕이 시나브로 드는 것이고, 푸릇푸릇한 기운에 은근슬쩍 젖어 드는 것이다. 하여 봄은 어떠한 기운이나 기척에 가깝다. 문득 둘러보면 어느새인가 곁에 다가와 있어서다.
지난겨울은 혹독했다. 유난히 추웠고 지독히 메말랐었다. 겨울이 모질었던 만큼 올봄은 드는 속도가 더뎠다. 2월 하순 봄을 찾아 남도를 헤매고 다녔지만, 예년의 생기는 못 만나고 돌아왔다. 겨울 가뭄에 시달린 봄꽃은 피기 전부터 시들었고, 남도의 들녘은 아직 채도를 끌어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기어이 봄은 우리 곁에 들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이맘때 남도의 들녘을 뒤덮었던 봄까치꽃은 못 봤지만, 들녘을 거닐다가 신발 밑창이 온통 붉은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렸다는 뜻이다. 남도라 불리는 고장, 전남 해남·진도·강진의 봄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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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세발나물과 보리싹
세발나물은 잔디처럼 생겼다. 한데 맛있다. 염생식물이어서 갯벌이나 간척지에서 자라는데 상큼하면서도 짭짤한 맛을 자랑한다. 최승표 기자
해남은 서해와 남해를 모두 낀 바다의 고장이지만 의외로 핵심 산업은 농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기초단체 중에서 농지 면적(356.18㎢)이 가장 넓다. 대흥사 동백, 미황사 매화보다 봄을 빨리 배달하는 건 배추·대파·마늘 같은 들녘의 농작물이다. 그러나 올겨울 남도는 유달리 추웠다. 1~2월 기온이 예년보다 훨씬 낮았던 탓에 농작물 냉해가 심각했다. 초록빛으로 싱그러워야 할 배추가 허옇게 썩은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봄동 작황도 좋지 못했다.
해남 사람들은 싱싱한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에 세발나물을 즐겨 먹는다. 살짝 데쳐서 된장에 버무려 먹으면 맛있다. 샐러드나 전으로도 제격이다. 최승표 기자
그래도 푸릇푸릇한 기운을 뽐내는 작물이 있었다. 바로 세발나물이다. 전국 생산량의 60%가 해남산이란다. 간척지인 문내면 예락마을에서 17개 농가가 세발나물을 재배한다. 비닐하우스로 들어가 봤다. 축구장 잔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걸 먹는다고? 몇 가닥 뽑아서 씹어봤다. 생긴 건 부추와 비슷한데 톡톡 씹히는 식감이 독특했고 짭짤한 맛이 났다. 세발나물연구회 김경식(67) 회장은 “소금을 좋아하는 염생식물이라 갯벌이나 간척지에서 잘 자란다”며 “겨울에 먹을 만한 채소가 없을 때 뜯어 먹던 나물”이라고 말했다.
세발나물은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다. 살짝 데쳐서 된장에 버무리기도 하고, 파무침처럼 만들어 고기 먹을 때 곁들이기도 한다. 샐러드나 부침개로도 제격이다. 10월부터 5월까지 재배하는데 요즘 나오는 세발나물이 가장 맛이 좋단다.
해남군 황산면 연호마을은 간척지를 활용해 보리 농사를 짓는다. 마을 주민들이 보리 밟기를 하는 모습. 새싹이 나올 때 밭을 밟아주면 보리 뿌리가 흙에 밀착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최승표 기자
초겨울에 파종한 보리도 싹을 틔웠다. 새싹 길이가 약 10㎝쯤 자라 보리밭마다 파릇파릇했다. 황산면 연호마을이 보리로 유명하다. 너른 보리밭과 바위 섬 ‘연기도’가 어우러진 풍광이 이채로웠다. 코로나 탓에 쉬었던 보리축제도 오는 5월에 재개할 예정이다. 올해는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보리순을 활용한 요리로 홍어앳국을 빼놓을 수 없다. 해장용으로도 안주용으로도 제격이다. 최승표 기자
보리는 씨앗만 먹는 게 아니다. 이맘때 나온 연한 새싹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먹을 수 있다. 보리싹 분말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다. 보리순 요리로 ‘홍어앳국’을 빼놓을 수 없다. ‘애’는 생선 간으로, 푹 삭힌 홍어에서 떼어내 국으로 끓여 먹는다. 홍어 애와 보리 순을 듬뿍 떠먹으면 처음엔 톡 쏘는 향이 치고 들어오고 버터처럼 기름진 애의 맛과 보리 순과 된장의 구수함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해남읍 홍어 전문식당 ‘일가식당’에서 애국을 맛봤다. 대낮부터 홍어앳국에 소주잔을 부딪는 사람이 많았다. “캬” “워메” “맛나다이” 감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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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봄동과 쑥
진도군 군내면 농민이 갓 수확한 봄동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맘때 재배한 봄동은 단맛이 강하다. 최승표 기자
진도에 들어가 먼저 찾아간 곳은 ‘운림산방’이었다. 조선 후기 화가 허련(1808~1893)이 낙향해 지낸 곳인데 정원이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연못에 비친 첨찰산이 멋졌고 곳곳에 동백꽃도 조금 피었지만, 아직은 봄보다 건조한 겨울 느낌에 가까웠다.
도리어 군내면 봄동밭에서 눈부신 초록을 마주했다. 거북이 등 껍질 같이 생긴 ‘독굴산’ 비탈면에서 수확 작업이 한창이었다. 할머니들이 여문 봄동을 칼로 도려내고 시든 이파리를 제거하면, 장정들이 박스에 채워서 트럭에 실었다. 일사불란한 모습이 포탄을 실어나르는 포병 부대 같았다. 따스한 봄 공기에 봄동의 달큰한 풋내가 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봄동은 진도 대표 농작물이다. 지난해 183개 농가가 봄동 4300톤을 수확했다. 전국 생산량의 38%나 된다. 봄동은 이름처럼 봄에 먹는 배추다. 요즘은 수확 시기가 빨라졌다. 9월께 보리 수확이 끝난 밭에 파종해 12월부터 수확한다. 서점례(76)씨는 “추운 겨울을 버텨낸 요즘 봄동이 가장 맛있고 영양도 좋다”며 “하우스에서 키운 봄동은 맛이 밍밍하다”고 말했다.
진도 대표 음식인 듬북탕. 모자반과 비슷한 해초인 '듬북'과 소갈비를 넣고 끓인다. 봄동무침, 톳나물, 마늘대무침 같은 밑반찬도 하나같이 맛있다. 최승표 기자
진도에서 봄동은 흔하다. 흔해도 너무 흔하다. 하여 봄동을 앞세운 식당 메뉴는 없다. 그래도 어느 식당을 가든 봄동이 반찬으로 깔린다. 진도 읍내 유명 식당에서 간장게장과 듬북탕(해초 ‘듬북’을 넣은 갈비탕)을 먹었는데 주요리보다 봄동나물이나 마늘대무침, 톳나물 같은 제철 밑반찬이 반가웠다. 이맘때 남도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진도군 조도면은 178개 섬으로 이뤄진 거대한 군도다. 상조도 도리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다도해 국립공원의 모습. 최승표 기자
진도는 쑥 생산량도 전국 최대다. 부속 섬 ‘조도’가 쑥의 본고장이다. 178개 섬으로 이뤄진 조도면에서도 가장 큰 섬인 상조도와 하조도의 쑥이 유명하다. 여수 거문도나 통영 한산도가 쑥으로 이름난 섬인데, 생산량은 조도가 압도적이다. 진도군에 따르면, 전국 쑥의 약 35%가 조도 산이란다.
상조도와 하조도에는 파란색 부직포를 덮은 쑥밭이 많다. 지금 조도에서 뜯은 쑥은 잎이 여리면서도 향히 강해 국거리로 좋다. 최승표 기자
2월 23일 진도항에서 배를 타고 하조도로 갔다. 비 갠 뒤라 하늘이 청량했다. 푸른 바다처럼 파란색 부직포를 덮어둔 자리가 모두 쑥밭이었다. 50여 명이 모여 부지런히 움직이는 봄동밭과 달리 쑥밭은 한결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윤슬 반짝이는 바닷가에서 삼삼오오 쑥을 뜯는 섬사람들에서 나른한 봄기운이 전해졌다. 새벽부터 해종일 쭈그린 자세로 쑥 뜯는 일이 고될 텐데도 농민들 얼굴은 하나같이 해사했다. 안정숙(70)씨의 쑥 자랑을 전한다.
“쑥은 6월까지도 캐는디 지금 쑥이 순하고 향이 좋아서 국으로 먹기에 제격이어라. 조도는 공기가 깨끗하고 약도 일절 안 치니께 이거야말로 무공해 쑥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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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련사 동백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서 찾아낸 동백꽃.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동백꽃 한 송이가 꼭 땅바닥에서 피어난 것 같다. 손민호 기자
봄이 들 무렵에는 강진을 꼭 들른다. 이맘때면 걷고 싶은 길이 있어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진 2㎞ 남짓한 오솔길. 이른바 ‘초당 가는 길’이다.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만덕산(408m) 남쪽 기슭 초당에 들어간 건 1808년 봄이었다.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별장을 손수 고쳐 초가를 지었다. 1818년 해배돼 경기도 남양주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다산은 초당에서 약 10년을 살았다.
초당에 머물던 시절 다산은 만덕산 옆 자락의 백련사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천년고찰 백련사에 다산과 막역한 우정을 나눈 혜장 선사(1772∼1811)가 있어서였다. 다산보다 열 살 아래였던 그는 다산을 스승이자 벗으로 예우했다. 두 사람은 무던히도 이 길을 걸으며 친분을 쌓았다. 다산이 한밤에 횃불 앞세우고 걸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초당의 다산이 오솔길을 걸으면 ‘백련사 가는 길’이고, 백련사의 혜장이 길을 걸으면 ‘초당 가는 길’이었다. 선비와 승려가 오간 길이었으니, 유교와 불교가 조우한 길이었다.
다산과 혜장 사이에는 차(茶)가 있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거느린 만덕산은 야생 차가 많아 예부터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 백련사 후미에 너른 차밭이 있다. 다산은 유난히 차를 아끼는 선비였으나 차 덖는 법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다산이 차가 떨어졌으니 어서 차를 달라고 혜장에게 강짜를 부리는 편지가 남아 있다. 2월 하순 백련사 차밭은 아직 푸르지 않았다.
백련사 동백꽃. 올해 만개한 동백이 바닥에 깔려 붉은 융단을 이루는 장관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사진은 몇 해전 3월 초순에 촬영했다. 중앙포토
백련사 차밭을 지나면 국내 최대 규모의 동백나무 숲이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 숲이다. 팔도에 동백 숲이 흔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은 많지 않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동백나무 북방한계선인 대청도의 동백나무 숲 다음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면적은 약 5만2000㎡로, 수령 100년이 넘는 동백나무만 1500여 그루가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는 유난히 못생겼다. 번듯한 나무보다는 비틀린 나무가 많고, 흉터 같은 옹이를 진 나무도 많다. 상처투성이 동백나무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백련사 홍매화.
백련사 수선화
백련사 동백 숲은 붉지 않았다. 예년에는 뚝 떨어진 꽃송이로 땅바닥이 온통 붉었는데, 채 피기도 전에 바닥을 뒹구는 봉오리가 많았다. 아직 계절이 이르기도 했거니와 겨울 가뭄이 독했다. 백련사 경내에서 막 봉우리를 터뜨린 홍매화와 수선화 몇 송이를 발견했다. 보름만 버티면 동백 숲은 붉게 물들 터이고, 다시 보름을 더 버티면 차밭은 푸를 터였다. 그래, 봄은 기다리는 것이다. 200년쯤 전 강진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을 겪었던 선비도 그렇게 기다려 마침내 봄을 맞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강진ㆍ해남ㆍ진도=손민호ㆍ최승표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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