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재배

기후적응 실패한 수미 감자…빠르게 변화하는 자연, 적응 못하는 농업

고재순 2023. 7. 2. 13:03

살기 좋은 미래를 보장할 기회의 창은 빠르게 닫히고 있다.”
전 세계 과학자와 세계 각국 정부 대표단이 합의해 작성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는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넘게 오른 세상에 인류가 적응하기 위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홍수, 산불, 태풍, 폭염 같은 기후 재난은 전례 없는 빈도와 강도로 인류 사회를 위협한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작물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수십년간 한국의 ‘대표 감자’였던 수미 품종의 위기는 기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농업의 미래를 보여준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사는 곳, 먹는 음식, 하는 일과 같은 삶의 기본 조건을 송두리째 흔든다.
국제기구와 과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변화는 이미 기정사실이며 ‘피할 수 없는 미래’라 경고한다. IPCC가 지난 3월 발표한 제6차 종합보고서를 보면 이미 33억~36억명이 기후변화로 생기는 극한 기상 현상과 식량 안보 위험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놓여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홍수, 가뭄, 태풍 등 기후 재난으로 죽은 이들의 비율은 ‘매우 취약한 지역’이 ‘가장 덜 위험한 지역’보다 15배 더 컸다.
세계 각국은 이미 ‘적응’을 준비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적응하는 것은 순응이나 포기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선택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대응의 두 축으로 온실가스 감축 위주의 ‘저감’과 적응을 함께 꼽는다.
애초에 인류의 역사는 지구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아 온 기록이다. 기후위기 적응은 다양한 기후재난으로부터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 자연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예방 대책부터 재난 이후 시민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생태계가 생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회복과 복원 대책을 모두 포괄한다. 또 위기를 기회로 바꿔 이익을 키우고 있는 산업 분야의 사례들은 인류의 적응력이 기후위기에서도 발휘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농업과학원과 지자체들이 협력해 구축한 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을 사용해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는 농가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물론 기후적응은 쉽지 않다. 우선 온실가스 감축으로 대표되는 ‘기후위기 완화’와 달리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감축이 숫자 등으로 정량화되어있는 것에 비해 분야별로, 사례별로 정량화하기도 어렵다.
경향신문은 국내외 기후위기 적응 현장을 다니며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에 한국 사회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폈다. 한국에서도 기후위기 적응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목차
①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 한국 사회 잘 적응하고 있습니까
② 기회가 된 기후적응, 정보가 위기를 바꾼다
③ “바람직한 기후위기 적응, 스스로 역량 키워야”

강원 횡성 둔내면의 감자 재배 농민 추승호씨가 지난 5월29일 수미 품종 감자가 자라고 있는 밭을 살펴보고 있다. 김기범기자

“수미는 이제 끝난 것 같아요. 빨리 알아차린 농민들은 벌써 몇년 전부터 품종을 바꾸고 있어요.”

지난달 29일 강원 횡성 둔내면의 감자 농장에서 만난 농장주 추승호씨는 국내 감자의 대표 품종이었던 ‘수미’가 “상품성을 잃었다”고 잘라 말했다. 수확까지 한달여가 남은 수미 품종을 심은 감자밭 앞에서 추씨는 “10년 전만 해도 수미를 훨씬 더 많이 키웠는데 이제는 여기 조그만 밭에서만 재배하고 있다”면서 “전체 7만평 정도 가운데 수미는 이제 7%뿐”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국내 감자 재배 비중 70~80%를 차지했던 수미는 빠른 속도로 씨감자로서 위치를 잃어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고온과 집중호우 등에 취약한 적응력을 보였고, 이를 재배하던 감자 농가들도 위협을 받고 있다.

수미는 1978년 처음 국내에 도입된 이래 45년간 지배적 감자 품종이었다. 수확량이 월등히 많았고 맛도 좋았다. 한국인들은 감자라고 하면 타원형인 수미의 모양을 떠올렸다. 농심이 ‘프리미엄 감자칩’으로 만든 제품의 이름도 ‘수미칩’이다. 7월에 수미 수확을 하고 난 뒤 같은 밭에 다른 작물을 심는 것이 가능한 지역이 많아 농민들은 너도나도 수미를 재배했다.

수미가 ‘대표적인 기후위기 적응 실패 사례’로 꼽히기 시작한 것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2010년대 들어서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남부지방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수미의 줄기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중부지방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병충해에 당하거나, 타원형이 아닌 길쭉한 기형으로 자라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례가 늘어났다. 농민들에 따르면 과거 수미는 평당 10~13㎏가량 수확이 가능했는데 현재는 6~8㎏으로 줄어든 사례가 많다. 최근 농민들이 선호하는 다름 감자 품종들은 평당 9~12㎏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강원 횡성의 감자 재배 농민 추승호씨가 지난 5월29일 저온 저장고에서도 싹이 나버린 수미 품종 씨감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김기범기자

진용익 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 감자연구실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고온 현상이 두드러지고, 가뭄이 찾아오는 일도 많아지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떨어지는 수미 품종의 수확량이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며 “과거에는 수미를 재배하는 비율이 70~80%에 달했지만 현재는 60%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체 농가의 감자 품종별 재배 면적은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씨감자를 채종하거나 사들이는 사례가 많은 탓에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는다.

경향신문이 이날 방문한 강원 횡성의 감자 농가를 비롯해 전화 취재를 통해 확인한 전국 곳곳의 감자 재배 농민들은 이미 길게는 10년, 짧게는 4~5년 전부터 수미의 상품성이 낮아져 재배 면적을 줄였다고 입을 모았다. 추씨도 과거에는 전체 밭의 30% 이상 면적에서 키우던 수미 품종을 두백, 설봉 등 품종으로 대부분 전환했다

강원 횡성의 감자 재배 농민 추승호씨가 지난달 29일 저온 저장고에 보관 중이었음에도 대부분 싹이 나버린 수미 감자를 살펴보고 있다. 김기범기자

저장이 어렵다는 점도 수미 퇴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미는 저온 저장을 해도 싹이 나면서 상품성을 잃기 쉽다. 실제 추씨 감자 농장의 저장고에서는 보관해 놓은 수미 감자 대부분에서 싹이 나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씨감자는 4~5도 정도의 저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저장고에 보관하는데 수미는 그래도 싹이 나곤 한다. 농업 전문가들은 너무 오랫동안 같은 품종이 재생산되면서 수미 씨감자가 퇴화하고, 환경 적응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수미의 퇴화를 알아차려 발빠르게 다른 품종으로 전환한 농가도 있지만 다수 농가는 여전히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수미를 키우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미 대신 다른 품종을 키우다 병해충이나 이상기후 등으로 피해를 보면서 수미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었다.

강원도 주요 감자 산지의 감자 종자별 농가 보급량. 국회 윤미향 의원실 제공.

지자체가 여전히 수미를 다량 보급하고 있어 농민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적기도 하다. 씨감자를 보급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그 비중은 아직 미미하고, 농민들은 대체로 지자체에서 씨감자를 보급받는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윤미향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강원도 감자종자진흥원이 최근 5년 동안 도내 농가에 보급한 품종별 씨감자 양을 보면 수미 씨감자는 매년 5000t 이상으로, 전체 보급량의 80%를 넘어선다. 다른 감자 품종 보급량을 모두 합친 무게가 1000t 미만이라는 점에서 수미 감자가 농업 부문의 대표적인 기후변화 적응 실패 사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들쑥날쑥한 강수량, 수시로 찾아오는 이상고온 등의 기후변화를 감자 농업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농림 당국도 이 같은 상황을 손 놓고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식량과학원 고령지농업연구소에서는 이미 ‘다미’처럼 수미보다 수확량도 많고, 맛도 좋은 여러 품종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오랫동안 키워온 수미를 아직 검증이 덜 된 신품종으로 바꾸기를 꺼리는 농민이 많다. 진 실장은 “맛과 수확량이 월등한 서홍 품종의 경우 껍질이 분홍빛에 속이 노랑색이다보니 유통업자들이 꺼려하고, 농민들도 재배를 안 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유통업자와 농민들이 수미를 고집하는 것에는 수미가 대표 품종으로 자리잡은 동안 한국인 다수가 수미의 외양과 맛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최근 수년 사이에는 이상고온과 이상저온, 집중호우 등으로 작황이 악화되면서 감자 농가가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감자 수확량은 매년 큰 편차를 보인다. 감자가 기후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작물이라는 점은 지난해 미국 등의 감자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벌어진 ‘감튀 대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감튀 대란은 기후변화와 물류대란으로 감자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국내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감자튀김, 웨지감자 등 수입 냉동감자로 만드는 메뉴 판매를 중단하면서 벌어졌다.

비교적 기온이 낮은 남미가 원산인 감자는 한국의 여름처럼 고온다습한 기후에 어울리는 품종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씨감자 수요를 100% 국산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언제 감자가 기후 적응 한계를 넘어서게 될지 알 수 없다.

‘기후 적응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영향을 더 이상 견디어내기 어려운 상태, 즉 위험을 피하기 위해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감자 농업의 경우 수미 감자 수확량이 급감해 감자 수요를 맞출 수 없게 되는 일이 적응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감자를 포함한 국내 농업 분야의 기후분야 적응은 ‘기온이 올랐으니 남부지방에서 키우던 작물을 북쪽에서 재배하는’ 등의 대증요법에 아직 머물러 있다. 농업 분야의 기후위기 적응 실패는 농민 수입 감소로 직결되는데 아직까지 과학적, 체계적 대응은 이뤄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을 과학적으로 판별하고, 지원하는 등의 농업 분야 적응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