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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여인들과 이분이 남긴교훈

고재순 2017. 5. 17. 09:33

퇴계 이황!
이황의 여인들과 이분이 남긴 교훈

조선의 유교사상,즉 성리학은 형식적인 예와 생산성이 없는 인간도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당파싸움에 국력을 낭비하고 망국으로 몰았으며 여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인식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황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의 선입견도 바뀌게 됩니다.고리타분한 유교의 형식주의가 아닌 실천속에서 인간이고 싶어한 그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상경여빈(相敬如賓)이란!
퇴계선생은 결혼을 앞둔 자녀와 제자들에게 편지글로 써서 강조했습니다
"부부란 서로 손님 대하듯 공경하라."

첫번째 여인은 그의 어머니가 되시는 춘천박씨 입니다.
퇴계선생은 1501년 온혜 노송정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공자가 대문으로 들어오는 태몽꿈" 을 꾸고 태어 났다고 합니다.
그가 세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홀어머니는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릴 들을까 봐 엄하게 키웠으니 퇴계 묘갈명에서도 "나에게 가장많은 영향을 끼친분은 나의 어머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두번째 여인은 21살에 장가를 간 영주의 초곡마을출신 허씨부인입니다.
아들 준을 낳고 둘째아들 채를 낳은 뒤 산후조리 휴유증으로 일곱달만에 세상을 떠나니 겨우 육년을 함께하였습니다.

세번째 여인은 둘째아들 채를 얻자마자 홀아비가 된 이황의 핏덩어리에게 젖을 먹여줬던 이름도 성도 없는 묘령의 여인 유모입니다.
퇴계도 남자인지라 둘 사이에서 아들 적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을 호적에 올릴수 밖에 없었고 또 뼈를 깍는 아픔을 퇴계의 가슴에 묻을수 밖에 없었던 성도 이름도 없는 여인이요

네번째 여인으로는 두번째로 맞이한 가일마을의 권질의 딸 권씨부인입니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때 예안으로 유배를 온 권질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는데 잇따라 가문에 사화로 인해서 가까운 혈육들이 죽어가자 충격으로 미쳐버린것입니다.
권질은 상처하여 홀로된 이황을 예안으로 불러들여
"자네가 상처를 했다는데 우리딸을 맡아주면 죽어도 눈을 감을수 있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라는 어른의 간곡한 부탁에 거절을 못해 그 자리에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혼 후 권씨는 제삿날 제상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폭에 숨겨 나오거나 제기 위의 대추를 집어먹다가 걸리는 등 정신 나간 일로 퇴계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퇴계는 그런 부인을 한 번도 꾸짖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이황의 도포자락을 빨간색 댕기로 기워주지만 이황은 태연히 도포를 입고서 제자들을 교육했다고하는 유명한 일화도 전합니다.관직에 있을 때도 아내 권씨의 매끼니를 손수 챙겨주는 자상함까지~ 사별할 때까지 16년간 그의 따듯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첫째 부인 허씨 소생의 아들들에게 친모상처럼 시묘살이를 하게 했으며, 자신은 권씨의 묘지가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일년 넘게 무덤을 지켰습니다. 장인도 깍듯이 모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권질은 사위가 지어준 자신의 초당 당호 사락정(四樂亭)을 아호로 삼았습니다.

다섯번째 여인은 맏며느리 봉화 금씨입니다
이황의 장남 준은 이웃마을인 외내의 자칭 명가 금재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혼례 때 퇴계는 상객으로 사돈댁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퇴계는 사돈 이외의 모든 금씨 일가친척들로부터 홀대를 당했답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사위를 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요. 퇴계가 일어서자 그들은 퇴계의 뒤통수에 대고
"퇴계가 앉았던 자리를 물로 씻어내라" 하고, 심지어 "대패로 밀어버려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금씨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낯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뵐 것인가….’ 그러나 퇴계는 일체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혹시 며느리가 상처를 받을까봐 더 자상하게 챙겼줬답니다. 때때로 머리핀이나 실패, 골무 등 가사 용품도 보냈고, 금씨가 아프면 약을 직접 챙겨 보냈으며,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금씨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잊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시아버님 묘소 밑에 나를 묻어라. 죽어서라도 그분의 혼을 모시겠다.”
봉화금씨가 죽어서 남편옆에 묻히지 않고 시아버지 이황의 곁에 묻혀있는 이유입니다.

여섯번째 여인으로는 관기 두향입니다.
두번째 부인까지 상처로 잃고 홀아비의 처량한 신세로 단양군수로 부임을 받게 되는데 환영식때 관기인 두향이가 퇴계선생을 보는순간 첫눈에 마음을 송두리채 뺏겨 상사병을 앓아 몸져 눕게 되었답니다.
퇴계는 특히" 청매화를 좋아하니 청매화 분재을 하나 길러 선물을 해보라" 는 말을듣고 곱게 손질한 매화분을 선물로 건넸더니 안동포보다 더 빳빳한 퇴계마음을 얻게 되었답니다.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게 되자
두향이가 준 청매화분과 남한강의 수석 두개만 품안에 품고 풍기로 오고서도 퇴계는 청매화분을 두향이 어루만지듯이 애지중지 했다 합니다 벼슬을 그만두고 도산 한서암에서 눈을 감을때까지 두향이의 얼굴은 살아생전 볼수 없었으나 매화분을 곁에두고 매화시를 108수나 남겨 애절한 조선판 선비의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이 떠나자 두향이는 관기에서 스스로 물러 나 남한강에서 운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는데.
선생이 보고싶어 사흘 밤낮을 걸어 도산에 오니
공교롭게도 건지산위로 퇴계선생의 시신을옮기는 꽃행여가 훠이 훠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두향이는 그 길로 단양으로 돌아가 남한강위에 신발을 벗어 치마를 뒤집어 쓴채 생을 마감하니 지금도 충주호 옥순봉 앞에는 "두향이지묘"가 있으며 단양 문화원에서는 아직까지 두향이제를 지내고 있답니다.

퇴계선생은 70세에 청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사후에 왕명으로 영의정에 추존되었으나 생전에 그의 뜻에 따라서 화려한 석물이나 큰 비석은 생략하고
도산에서 물러나 숨어 살았던 진성이씨의 묘라는
지극히 작고 초라한 비문이 있슬 뿐입니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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