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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녹은 꽃 시절, 유순한 섬진강 줄기가 곁을 내어준 마을은 산수유마을이나 매화마을 같은 꽃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골짝 저 골짝 뭉글뭉글 꽃 대궐이라, 꽃그늘 아래 앉아서도 강 건너 꽃구경이 일이다. 꽃길 순례에 밭은 일정은 예의가 아닌 바. 홀리는 대로 걷다가 마음 머무는 자리에 멈춰 가만히 바라볼 일이다. 피는 꽃과 지는 꽃을, 낱낱의 이별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흐를 뿐인 강물을. 유정도 무정도 아닌 아득하고 무한한 서사를.
이즈음 남도의 꽃 소식은 ‘꽃몸살’이니 ‘꽃멀미’니 ‘꽃사태’니 하는 제목을 달고 전해진다. ‘꽃-’을 떼고 보면 하등 좋을 것도 없는 몸살과 멀미와 사태가, ‘꽃-’을 만나 별안간 환해진다. ‘꽃차례’란 단어를 처음 봤을 때도 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표현인 줄 알았다. 잔설을 떨친 가지마다 이제는 꽃차례라는 건가 보다, 바야흐로 만개하는 시절, 꽃 세상이라는 뜻인가 보다 했다. 북풍한설이 물러나며 ‘꽃, 네 차례야-’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충분히 그럼직하다 여겼으나 기실, 꽃차례는 가지에 붙어 있는 꽃의 배열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한자로는 ‘화서(花序)’라 이른다. 단꽃차례와 복꽃차례, 무한꽃차례와 유한꽃차례 등 형태와 순서에 따른 분류법도 주섬주섬 주워 삼켰지만, 한 번 마음 붙인 오독은 여전히 유효하여 이렇게 주억거리곤 한다.
‘아무렴, 이제 꽃차례지. 그래 지금 누구 차례인가, 매화? 산수유?’ 그리하여 내 멋대로 명명한 섬진강 봄꽃 지도의 또 다른 이름은 섬진강 꽃차례 혹은 섬진화서(蟾津花序)다. 남도의 봄꽃 성지로 손꼽히는 구례, 광양, 하동은 섬진강을 줄기 삼아 피어난 꽃마을이다. 강줄기가 곁을 내어준 마을마다 차례차례 산수유가 번지고 매화가 벙글고 벚꽃이 터진다. 시간 순서로 보자면 산수유와 매화는 동시다발로 피어나고 벚꽃이 한발 늦다. 산수유가 아른아른 봄볕 속에 멸하고 매화 꽃잎 난분분 흩날릴 때가 물 오른 벚꽃의 시간, 벚꽃 차례다.
지리산 자락에 깃든 노란 꽃구름 구례의 봄은 산동면 일대에 번진 산수유꽃으로 노랗게 들떠 온다. 매화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봄의 전령사임을 자임하는 산수유는 3월 초에 꽃을 틔우기 시작해 3월 말쯤 절정을 이룬다. 통칭 ‘산수유마을’로 불리는 대평, 반곡, 하위, 상위, 현천, 계척마을 중 지리산과 가장 가까운 상위마을의 풍광을 으뜸으로 친다. 오래된 돌담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노란 꽃길이 정겹기 그지없다. 중국 산둥성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심었다는 산수유 시목(始木)은 계척마을에 있다.
산수유나무는 일교차가 심한 산비탈에서 잘 자란다. 지리산 산자락에 깃든 이들 마을이 국내 산수유 생산량의 70%를 책임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산수유 열매는 신장과 골수를 튼튼하게 하고 신경통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매년 봄에는 꽃으로 가을엔 열매로 축제를 여는데, 올해의 ‘산수유꽃축제’는 3월 19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다. 같은 노랑꽃이라도 개나리와 산수유는 느낌이 영 다르다. 개나리가 경쾌한 웃음소리라면 산수유는 아련한 미소 같다 할까. 한데, 의외로 반전이 있는 꽃이다. 멀리서 보면 파스텔톤 연노랑빛이 아른아른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낱낱의 형태가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의 향연과도 같다. 자디잔 꽃송이들이 마치 폭죽 터지듯 펼쳐져 있어 한 송이라 여긴 게 실은 한 무더기다. 이와 같은 꽃의 배열을 산형꽃차례라 한다. 꽃대의 꼭대기 끝에 여러 개의 꽃이 방사형으로 달린 무한꽃차례의 하나다.
산수유를 묘사한 잊을 수 없는 명문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 여수 기행문 편에 등장한다. 동백부터 매화, 산수유, 목련에 이르기까지 봄꽃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페이지마다 흥건하여 꽃 여행을 떠날 때면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중략)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실은, 생강나무 앞에서도 저 문장을 곱씹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산수유꽃과 생강나무꽃을 구분 못하던 시절, 꽃놀이를 가도 꽃구경보다는 술추렴이 더 좋았던 때의 이야기다. 구례까지 와서 산수유만 보고 떠나긴 아쉽다. 광양으로, 하동으로 무수한 꽃길과의 약속이 바쁘더라도 화엄매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기필코 화엄사에 들러야 한다. 각황전 앞에 키가 우뚝한 300년 수령의 홍매로, 꽃이 붉다 못해 검붉다 하여 흑매라고도 부른다. 순천 선암사의 600년 선암매가 꽃을 피우면 그 향기가 산 너머 화엄매를 깨운다는데, 작년에는 화엄사 홍매가 먼저 피었더랬다. 출사객과 관광객에 에워싸여 소란한 와중에도 화엄매는 장엄미를 견지했다. 눈을 찌르듯 선연한 진분홍 꽃잎을 한참 우러르다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이란 릴케의 말을 떠올렸다. 무한한 시간 단위도 겁(劫), 무서움도 겁(怯). 피고 지고 피고 지는 무한한 꽃의 윤회에, 겁(劫)의 시간을 돌아왔을 것 같은 꽃나무의 정령에, 겁(怯)인 듯 경외심인 듯 절로 수굿해지는 것이었다.
봄이 다 가도록 숨어 살고픈 꽃그늘 섬진강변 매화 일번지는 광양 다압면 청매실농원이지만, 호젓하게 매화를 감상하고 싶다면 하동 흥룡리 먹점마을이 좋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청매실농원 건너편에 자리 잡은 산골 마을로, 청매실농원이 블록버스터라면 먹점마을 매화군락은 독립영화에 가깝다. 지리산 구제봉 중턱 해발 400m 고지에 일부러 숨긴 듯 들어앉은 마을은 산세의 비호 속에 6·25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산간 오지에 내린 축복은 그런 것일 게다. 아수라판 같은 세상사와 절연할 수 있는 자유. 먹점은 이곳에서 먹이 많이 생산됐다 하여 유래한 지명으로 묵점이라고도 부른다. 황토를 이겨 바른 농가와 다랑이밭, 오솔길이 어우러진 수더분한 풍경 속에 다문다문 깃든 매화는 화려하기보다 은은하다. 그 고요에 기대 오롯이 향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먹점마을 매화 감상의 즐거움이다. 청신하고 달큰한 암향(暗香)에 취해 걷노라면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것 같다.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마을에 방 한 칸을 얻어 매화가 꽃보라로 사라질 때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저녁으로 돌담 밑에 흩뿌려진 연분홍 손톱 같은 매화 꽃잎을 쓸어 담으며, ‘봄이 오는 사태만큼 사실 큰 사건은 없다’라고 중얼거리고 싶었다. 봄이 오는 사태만큼 사실 큰 사건은 없다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 씹어 먹어도 먹어도 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문인수, ‘동백 씹는 남자’ 중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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