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좋은말 1717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판일수록 좋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한 장일수록 좋다. 누군가가 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빛깔의 여백으로 가득 찬 마음, 그 마음의 한 쪽 페이지에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마시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우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마르지 않고, 나누어 마시면 마실수록 단맛이 난다. 사랑은 가난할수록 좋다. 사랑은 풍부하거나 화려하면 빛을 잃는다. 겉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은 속으로는 알찬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너무 화려한 쪽으로 가려다 헤어진 사랑을 본다. 너무 풍요로운 미래로 가려다 갈라진 사랑을 본다. 내용은 풍요롭게, 포장은 검소해야 오래가는 사랑이다.

좋은글 좋은말 2023.05.29

가시

가시 /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좋은글 좋은말 2023.05.29

108 번뇌의 의미

절에 가면 대부분 스님들의 세납이 일흔을 훌쩍 넘기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봐도 연세가 많은 것 같지 않은데 물어보면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는 큰 스님께 무례를 무릅쓰고 세납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님, 올해 세수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왜 물어. 이 놈아!” “그냥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헷갈려요.” “허허, 이 놈 봐라, 세속에서 산 세월이 20년이요. 부처님하고 산 세월이 60년이니 갈 날이 꼭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대개 스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81세에 열반 하셨으니 81세까지 사시려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알고 있는 스님들은 부처님의 삶보다 오래 사신 분들이 많고 정정하시다. “그럼 여든이시네요.” “계산도 잘 하네. 이놈아. 그런데 너 사람이 오래 사는 조건..

좋은글 좋은말 2023.05.28

들길을 거닐며

들길을 거닐며 나태주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그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러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 어제도 들길을 거닐며 당신 생각했어요 오늘도 들길을 거닐며 당신 생각합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잎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는 봅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오직 그대 그대 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버물러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 어제도 들길을 거닐며 당신 생각했어요 오늘도 들길을 거닐며 당신 생각합니다 나도 당신 발에 밟히어 새로운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떨리는 풀잎이면 합니다 풀잎이면 합니다

좋은글 좋은말 2023.05.28

봄이 그냥 지나요

봄이 그냥 지나요 김용택 올 봄에도 당신 마음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내 다니는 길가에 꽃들 피어나니 내 마음도 지금쯤 당신 발길 닿고 눈길 가는 데 꽃피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면 마음이 서로 곁에 가 있으니 서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린 서로 꽃보면 쓸쓸하고 달보면 외롭고 저 산 저 새 울면 밤새워 뒤척여져요 마음이 가게 되면 몸이 가게 되고 마음이 안 가더래도 몸이 가게 되면 마음도 따라가는데 마음만 서로에게 가서 꽃피어나 그대인 듯 꽃 본다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도 꽃산 하나 갖고 있고 나도 꽃산 하나 갖고 있지만 그 꽃산 철조망 두른 채 꽃피었다가 꽃잎만 떨어져 짓밟히며 새 봄이 그냥 가고 있어요

좋은글 좋은말 2023.05.14

가구

가구 도종환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는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 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잊어버리고 돌아 나온다 그러면 아내는 다시 아래위가 꼭 맞는 서랍이 되어 닫힌다 아내가 내 몸의 여닫이문을 먼저 열어보는 일은 없다 나는 늘 머쓱해진 채 아내를 건너다보다 돌아앉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계간 [작가세계] 2003 봄호

좋은글 좋은말 2023.05.13

너를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너를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용혜원 ​ 너를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참 행복해 모든 것이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너를 만난 순간부터는 날마다 좋은 일들이 일어날까 기대감 속에서 산다 너를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참 즐거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충만하다 너를 만난 후로는 날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이 어디 있을까 웃음 속에서 산다

좋은글 좋은말 2023.05.13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사람 / 용혜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과 아는 것을 애써 잘난 척하지 않고도 자신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겸손함과 지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돋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비치는 거울이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남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선한 눈을 가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과장해 보이지 않는 온유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특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헤아려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깊은 배려가..

좋은글 좋은말 2023.05.13